새해 첫 주 일요일, 식탁 위에 빈 달력과 얇은 파일을 펼쳐 둔다. 지난해의 영수증과 COA, 프레임 견적서가 차분히 쌓여 있다. 나는 먼저 숫자를 적지 않는다. 대신 한 문장을 가운데에 쓴다. “예산은 분기 단위로, 결정은 하룻밤 단위로.”
그 아래에 네 칸을 그린다. 1분기·2분기·3분기·4분기. 각 칸의 구석에 작은 메모를 붙인다. “봄—탐색·소형 구매”, “여름—정리·프레임”, “가을—압축·선택”, “겨울—결산·보존”. 작년의 실수를 떠올린다. 봄의 들뜸에 두 점을 연달아 결제했고, 가을의 과열에 프레임 예산이 밀렸다.
올핸 리듬을 바꿔 보기로 한다. 분기마다 한 번, 예산을 조정하고, 모든 결정을 하룻밤을 지나 내리는 방식으로. 이 간단한 리듬만 갖추면, 지갑은 속도를 잃고 판단은 문장을 얻는다.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려는 게 아니다. 설렘을 오래 남기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연간 설계의 핵심 : 분기 예산, 총액 언어, 속도장치
연간 설계의 핵심은 셋이다. (A) 분기 예산, (B) 총액 언어, (C) 속도 장치(하룻밤·워크어웨이 넘버).
(A) 분기 예산은 월 단위의 들쭉날쭉함을 평균화한다. 예를 들어, 1분기 바스켓을 300이라 가정하면 티켓·서적 45 / 소형 원본·에디션 150 / 프레이밍·운송 90 / 예비 15로 시작한다. 2분기로 넘어갈 땐 실제 지출을 기준으로 비중을 리밸런싱한다. 봄에 소형을 들였다면 여름엔 프레임과 도록으로 무게를 옮기고, 가을의 페어 시즌에는 프레임을 줄이고 표준 사양 한 점의 총액을 대비한다. 중요한 건 항목 이름이 아니라 “분기마다 닫힌 바구니를 한 번 비워 보고 다음 바구니로 옮겨 탄다”는 감각이다.
(B) 총액 언어는 지출의 실제를 드러낸다. 가격표의 숫자는 절반일 뿐이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두 줄을 켠다. 작품가 X + 프레임/장비 + 운송/보험 + (세금·서류) = 총액 Y. 종이·사진을 좋아하면 프레임이, 영상·설치를 들이면 장비·설치가 경험의 절반이다. 분기 바스켓은 이 총액 기준으로 움직인다. “이번 분기엔 도록 10권을 사느니, 프레임 두 개를 올리자.” 같은 교환이 가능해진다.
(C) 속도 장치는 과열을 막는다. 첫째, 하룻밤 보류. 오늘 본 건 내일 결제한다. 둘째, 워크어웨이 넘버(총액 상한). 경매든 갤러리든, ‘총액 기준’으로 철수선을 미리 적어 둔다. 셋째, A/B 달. 한 달은 드로잉·에디션 같은 소형·저위험 선택에, 다음 달은 정리·프레임에 집중한다. 리듬이 생기면, 우연한 발견도 단단히 붙잡을 탄력이 생긴다.
분기-총액-속도. 이 세 단어가 연간 예산의 척추가 된다. 같은 돈을 써도 만족이 길어지고, 같은 작품이라도 지갑에 남는 여백이 커진다.
연간 설계 현장 실전
1월의 차가운 빛 아래, 나는 분기 예산을 실제 동선으로 연결한다. 일요일 오전 미술관에서 표준 사양의 눈을 다시 세우고(120×100, 80×60), 오후엔 온라인 뷰잉룸에서 관심작을 6개 탭으로 띄운다.
연도/크기/재료/문헌/총액 5열 표를 만들어 한눈에 비교한다. 사진은 프레임 포함, 영상은 장비 포함 견적을 요청한다. 저녁에는 프레이머 샘플을 같은 조도에서 비교해 반사율과 색온도를 메모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1분기의 예산이 현실의 얼굴을 갖는다.
봄이 오면 속도가 붙는다. 토요일 아침 클러스터를 90분 루프로 걷는다. 첫 주엔 “스캔”만 한다. 전면–디테일–라벨 세 장. 둘째 주부터 대화를 연다. “이 시리즈의 표준 사양은 어디인가요?”, “기관·도록 본문이 붙은 이미지는?”, “(사진·판화라면) 사이즈별 총 에디션 수와 A.P./P.P.는?”, “프레임/운송 포함 총액은?”
네 문장을 반복하다 보면 욕심이 문장으로 탈수된다. 마음이 크게 움직인 날에도 결제는 하지 않는다. 하룻밤을 사이에 두면, 감정은 가라앉고 문장은 떠오른다. 다음 날 아침, 워치리스트 상단 두 점만 남겼을 때도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때 움직인다.
여름은 정리의 계절이다. 도서관에서 전시 카탈로그와 카탈로그 레조네를 훑고, 봄에 모은 프레스 릴리스·라벨 사진을 폴더에서 정리한다. 프레임 작업은 이때 몰아서 한다. UV 아크릴·아카이벌 매트·밀폐식 백보드의 조합을 표준으로 잡고, 벽의 높이·빛의 방향에 맞춰 설치 계획을 다시 그린다.
‘작품가보다 프레임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프레임이 좋아지면 작품이 커지고, 작품이 커지면 집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바스켓의 30%를 기꺼이 보존에 쓰는 이유다.
가을은 압축의 계절이다. 페어·프리뷰·경매가 겹치면, 나는 하루를 “오전 스캔–오후 대화–밤 정리”로 고정한다. 스캔은 여전히 세 장, 대화는 여전히 네 문장, 밤의 정리는 상단 5점 + 두 문장(왜/총액)으로 끝낸다. 경매는 프록시 비드로 총액 상한만 입력하고 끈다.
화면을 오래 바라보지 않으면, 충동의 확률이 줄어든다. 설치·영상은 계약서에 “가정용 설치 버전·대체 장비·마이그레이션 조항” 세 줄을 반드시 넣는다. 사랑이 오래 가려면 계약이 명료해야 한다. 가을의 승부는 정보량이 아니라 규율이 낸다.
겨울은 결산의 계절이다. 폴더를 열어 한 해의 지출을 항목이 아니라 이미지 단위로 정리한다. 좋아한 이유와 설명 가능한 근거가 여전히 맞물리는지 확인한다. 내 취향 선언문(“나는 여백이 넉넉한 소형 드로잉을 좋아한다/두 톤의 중형 회화를 좋아한다…”)이 실제 구매·프레임·설치 사진과 얼마나 겹치는지도 체크한다.
겹치지 않는다면 선언문을 바꾸지 말고 동선을 바꾼다. 내가 찾는 문법을 걸어두는 공간으로 코스를 옮기는 편이 훨씬 빠르다. 마지막으로, 내년의 바스켓 초안을 써 둔다. “1Q 소형·도서, 2Q 프레임, 3Q 표준 사양 한 점, 4Q 보존·정리.” 다음 해의 리듬이 오늘 밤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아주 실용적인 속도 조절 한 가지. A/B 달을 돌린다. 홀수 달은 ‘소형·저위험’ 빠른 호흡(드로잉·에디션·프레임), 짝수 달은 ‘정리·보존’ 느린 호흡(프레임 교체·설치 재조정·도서). 이렇게 나눠보면, 갑작스러운 발견에도 바스켓의 어딘가가 항상 비어 있게 된다. 여유가 공간에 생기면 결정은 더 정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빨간 점이 아니라 근거와 리듬으로 움직이길 원하니까.
주요 용어 및 추천 미션
주요 용어
- 워크어웨이 넘버(총액 상한): 작품가가 아니라 작품가+프레임/장비+운송/보험+(세금·서류)의 총액 기준 철수선. 경매·페어·갤러리 모두에 적용한다.
추천 미션
- 달력 첫 페이지에 “예산은 분기 단위, 결정은 하룻밤 단위”를 적고, 바스켓별 항목 비중을 분기 말 리밸런싱하세요.
- 모든 문의·협상·입찰을 총액 언어로 시작하세요. 작품가 + 프레임/장비 + 운송/보험 + (세금·서류) 두 줄이 속도를 늦추고 판단을 선명하게 합니다.
- 분기마다 프레임 데이를 정해 UV 아크릴/아카이벌 매트/백보드 조합을 표준화하세요.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다음 회차 예고: “보관, 액자, 조명 : 집에서 작품을 오래, 예쁘게”. 박스·슬리브·디지털 백업부터 UV 아크릴·아카이벌 매트의 표준 사양, 조도·색온도·배선까지, 거실을 작은 미술관으로 만드는 생활 보존 설계를 한 번에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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