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미술시장/생활 밀착형 수집의 기술

위작을 피하는 생활 수칙 - 라벨·문헌·컨디션·가격 신호로 만드는 방어막

o-happy-life 2025. 9.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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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온라인 뷰잉룸에서 마음이 덜컥 움직였다. 좋아하던 작가의 2000년대 중반 드로잉이 “프라이빗 세일”에 나와 있다. 가격은 최근 결과의 절반쯤. 화면을 넘기다 보니 라벨 사진이 어딘가 허전하다. 갤러리 스탬프 대신 모르는 프레임 숍 스티커, COA는 있지만 발행 주체가 애매하다.

위작을 피하는 생활 수칙


나는 노트에 네 단어를 적는다. 라벨, 문헌, 컨디션, 가격. 그리고 한 줄 더: “하룻밤 보류.” 위작을 피하는 기술은 천재적 감식안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생활 절차다. 신호를 모아 문장으로 확인하고, 문장을 문서로 남기는 일. 오늘은 그 절차를 생활 속으로 끌고 와 보자.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한 가지 약속만 지키면 된다. 어떤 물건도, 오늘 보는 것으로 오늘 결제하지 않는다.

 

출처, 물성, 가격·속도

 
위작 방어의 핵심은 세 층으로 정리된다. (A) 출처(프로버넌스·문헌), (B) 물성(컨디션·사양 일치), (C) 가격·속도(총액·하룻밤).
 
(A) 출처: 좋은 프로버넌스는 짧아도 연결이 또렷하다. “초기 갤러리→컬렉터 A(인보이스 있음)→현 소장자(위임장/판매 위탁서)”처럼 연속된 체인이 보이면 신뢰가 오른다. 문헌은 도록 본문·대형 도판·기관 전시 목록 등 검증 가능한 페이지가 핵심이다. “한 번 전시되었다”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떤 제목·치수로" 였는지. 카탈로그 레조네가 존재하는 작가면 번호 대조가 최우선이다.
 
(B) 물성: 라벨·서명·치수·재료·에디션이 시리즈의 규칙과 맞는지 본다. 캔버스라면 당시 작가가 쓰던 천·프라이머·스테이플 위치가, 종이라면 종이 종류·수치·수분 자국이, 사진이라면 프린트 공정·인화지·프린트숍 스탬프가, 판화라면 플레이트 마크·에디션 표기·퍼블리셔 표식이 맞아야 한다. 컨디션은 보존의 문제이자 진정성의 단서다. 지나치게 “새것 같은” 20년 전 작업은 때로 경계 신호다.
 
(C) 가격·속도: 위작·문제작의 가장 흔한 문구는 “지금만 이 가격”. 가격은 항상 총액 언어로 본다. 작품가 X + 프레이밍/장비 + 운송/보험 + (세금·서류) = 총액 Y. 여기에 확인 비용도 넣는다. 컨디션 리포트·문서 열람·보존사 소견·브로커 수수료. Y가 현실이 되면 “싼 듯 보이던 가격”의 마법이 풀린다. 그리고 하룻밤. 한밤의 열기는 위조의 친구다. 다음날 아침의 판단이 진짜 방어막이다.

 

위작을 피하는 실전 루틴

 
1단계 : 칸 만들기

메모앱에 네 칸 표를 연다. 라벨/문헌/컨디션/가격. 라벨 칸에는 사진으로 보이는 모든 텍스트를 옮겨 적는다. 갤러리명, 주소·전화, 스톡 번호, 전시 제목, 날짜, 프레임 숍 스티커까지. 문헌 칸에는 도록·전시 기록의 후보를 적고, 페이지 대조가 가능한지 여부를 표시한다.
 
컨디션 칸에는 보이는 흠·가려진 부분·프레임에 가려진 여백 유무·뒤쪽 사진 유무를 분류한다. 가격 칸에는 작품가와 함께 확인 비용(컨디션 리포트, 보존사 소견, 운송/보험 견적)을 적어 총액을 만든다. 이 표는 내 감정을 검증 가능한 문장으로 바꾸는 첫 시작이다.
 
2단계 : 이메일 한 통

판매자에게 같은 템플릿으로 메일을 보낸다.

  • “라벨·뒷면·프레임 해체 전·후 사진을 부탁드립니다(가려진 여백 포함).”
  • “COA 발행 주체와 날짜, 초기 인보이스(또는 위임장) 사본 제공이 가능할까요?”
  • “해당 시리즈의 문헌·기관 전시 기록과 페이지/번호 대조표가 있을까요?”
  • “컨디션 리포트(제3자 보존사 소견 포함)가 있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답변의 속도와 구체성이 첫 체감 지표다. 성의 없는 답변, 사진 회피, 다른 이야기로 도는 메일은 빨간 깃발이다.

3단계 : 규칙 대조

작가·시리즈별로 알고 있는 규격·재료·서명 위치를 대조한다. 예컨대 단색화 드로잉이면 종이 사이즈와 서명 위치, 윤곽선의 흔들림 패턴이 일관적인지.
 
사진이면 프린트 연도와 촬영 연도의 자연스러운 간격(빈티지/모더니스트 프린트 구분), 프린트숍 스탬프의 폰트·배치가 알려진 예와 같은지. 판화면 플레이트 마크의 깊이·판끝 여백·종이 수치(예: 56×76cm 등 관용 규격)·에디션 구문(예: 23/75, A.P. 5, P.P. 2)이 퍼블리셔 포맷과 맞는지. 모호하면 ‘확인 비용’을 총액에 올리고 보존사·전문가의 비대면 소견부터 받는다.
 
4단계 : 가격을 현실로

이제 표의 가격 칸을 다시 본다. 작품가가 최근 결과의 50~70%인데 문헌·체인이 빈약하다면, “싼 게 아니라 불확실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운송·보험·세금·검증 비용까지 올린 총액 Y가 실제로는 같은 작가의 문헌 상단 작품의 최근 시세에 근접해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다.
 
(a) 증거를 더 모아 Y를 방어하거나, (b) 후보를 바꾸어 근거 상단을 고른다. 위작을 피한다는 건 때로 “지금의 유혹을 예의 있게 지나치는 기술”이다.
 
5단계 : 하룻밤, 그리고 전화 한 통
아침이 오면 마음의 온도는 내려가고 문장의 선명도는 올라간다. 여전히 후계(에스테이트/갤러리)와의 연결이 필요하면 갤러리를 통해 해당 기관에 문헌 대조 문의를 넣는다. 직접 DM보다 공식 창구가 기록과 시간을 절약한다.
 
“기관/레조네 번호 대조에 비용·시간이 필요한가요? 가능하면 절차·수수료를 알려 주세요.” 진행이 더디거나 거부되면, 그것 역시 결정적 신호다. 우리는 좋은 작품을 찾고 있지, 곤란한 상황을 사려는 게 아니다.
 
예시 장면 하나 
봄의 어느 날, 온라인에서 발견한 사진 작품 하나. 설명으론 “크로모제닉 프린트, 2004/프린트 2005, 에디션 7/10.” 프린트숍 스탬프가 낯설어 판매자에게 뒷면 전체 사진을 요청한다. 도착한 사진을 확대해 보니 스탬프 폰트가 공인 예시와 1mm쯤 다르고, 위치도 정렬에서 어긋나 있다. 
 
“스탬프 변형이 있었던 시기·사례가 있는지”를 정중히 묻자, 판매자는 “확인해 보겠다”고 답한다. 이틀 뒤, 그는 “문서가 명확하지 않아 이번 건은 철회하겠다”고 한다.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 이틀이 워치리스트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위작을 피하는 최고의 기술은 때로 멈추는 용기다.
 

주요 용어 및 추천 미션

주요 용어

  •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 한 작가의 공식 전작 목록. 작품의 번호·치수·재료·이미지가 수록되어 있어 대조의 1순위다.
  • 체인 오브 커스터디(Chain of custody): 작품 소유·이전의 연속 기록. 인보이스·위임장·대여 계약서 등 문서 간 끊김이 없는지가 핵심이다.
  • 레드 플래그 프라이싱(Red-flag pricing): “지금만 이 가격” “경이적 컨디션의 초저가” 같은 심리 압박형 문구. 대개 문서·컨디션·체인 중 하나가 약하다.

추천 미션

  • 네 칸 표 라벨/문헌/컨디션/가격을 템플릿으로 만들고 모든 후보에 적용하세요. 감정이 문서로 빨리 바뀝니다.
  • 판매자에게 “뒷면 전체·프레임 해체 전후·라벨 접사·COA 발행 주체·초기 인보이스 사본”을 한 번에 요청하세요. 답변의 질이 신뢰의 첫 지표입니다.
  • 의심이 커지면 즉시 하룻밤 보류하고, 다음 날 후계/갤러리 공식 창구로 레조네·문헌 대조 문의를 넣으세요. 멈추는 속도가 실력입니다.

다음 회차 예고: “보험, 대여, 기증 입문", 내 작품을 지키고(보험), 잠시 세상에 내어주고(대여), 함께 나누는 길(기증)에 대해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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