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미술시장/생활 밀착형 수집의 기술

나의 취향을 한 줄로 - “나는 ○○한 작업을 좋아한다.” 선언문 만들기

o-happy-life 2025. 8. 30. 06:00
반응형

일요일 오후, 미술관 로비의 긴 벤치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오늘은 많이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로 한다. “나는 ○○한 작업을 좋아한다.” 빈칸을 오래 바라본다.

 

오전에 본 전시를 거꾸로 되감는다. 한 벽을 채운 대형 회화는 좋았지만 마음이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오히려 복도 끝, 유리 안쪽에 있던 작은 드로잉 앞에서 발이 멈췄다. 종이의 섬유가 사선으로 빛을 먹고, 여백이 선을 부드럽게 감싸던 그 순간. 노트에 첫 단어가 적힌다.

 

“나는 여백이 넉넉하고 선의 호흡이 느린 작업을 좋아한다.” 문장을 더듬더듬 고쳐 본다. “나는 종이의 섬유가 살아 있고 여백이 넉넉한, 작은 드로잉을 좋아한다.” 단정한 문장 하나가 이상할 만큼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나의 취향 선언문

 

이 문장만 있으면 오늘 이후의 선택이 조금 쉬워질 것 같다. 전시장에서 느낀 막연한 ‘좋음’이, 집의 벽과 지갑에서 버틸 수 있는 생활의 언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취향 선언문, 관찰 가능한 속성으로

취향 선언문은 형용사를 줄이고 관찰 가능한 속성으로 쓰일수록 강해진다. “시원하다/묵직하다/감성적이다” 같은 느낌의 단어는 방향을 주지만, 갤러리에서 가격과 설치를 논의할 때는 힘이 약하다.

 

대신 다음 여섯 범주로 번역해 본다. 재료(종이/캔버스/섬유/세라믹/사진/영상), 표면·프로세스(연필·먹·압출·스크래치·실크스크린), 스케일·비례(소형/중형/벽 대비 1:4/세로형), 빛·색(저조도·무광·한 톤/두 톤), 리듬(반복/여백/장면 전환 속도), 시간성·문헌(연대/시리즈/기관·도록 신호).

 

예를 들면 이렇게 바뀐다.

  • “나는 종이 표면이 무광이고 선의 리듬이 느린, 40×30cm 내외의 드로잉을 좋아한다.”
  • “나는 두 톤만 쓰고 반복이 규칙적인, 120×100cm 표준 사양의 회화를 좋아한다.”
  • “나는 12–15분 루프의, 장비 소음이 낮고 가정용 버전이 정의된 영상을 좋아한다.”

이렇게 쓰면 가격 감각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종이·사진을 좋아한다고 선언하면, 프레이밍(유브이 아크릴·아카이벌 매트)이 총액의 핵심이 된다. 중형 캔버스의 표준 사양을 좋아한다면, 운송·보험·문전 설치가 예산의 변수다. 영상·뉴미디어라면 장비 포함/제외·대체 스펙·마이그레이션 조항이 가격의 일부다.

 

취향 문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예산 배분의 지도다. 또한 유동성(되팔기 아님, ‘다음 선택의 자유’) 측면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표준 사양·문헌 신호·보존 명료”로 쓰인 문장은 워치리스트의 후보를 빠르게 걸러 주고, ‘좋지만 우리 집·우리 예산과 충돌하는 경우’를 조용히 바깥으로 밀어낸다.

 

마지막으로 선언문은 거절의 문장이기도 하다. “나는 거대한 스케일이나 강한 광택보다 무광 표면과 가까운 관람 거리를 선호한다.” 이렇게 적어 두면 페어의 과열, SNS의 유혹, ‘지금 아니면 못 산다’는 속삭임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날 수 있다. 좋은 취향은 취사선택의 기술이자, 속도 조절 장치다.

 

취향 선언문 만들기 실전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오늘의 과제를 쪽지로 쓴다. “한 문장의 취향 선언문 만들기.” 첫 갤러리에서 나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는다. 전면에서 10초, 45도에서 10초, 라벨 앞에서 10초. 세 번의 호흡이 끝나면 눈에 붙은 단어를 잡는다. 무광, 여백, 세로형, 반복, 두 톤. 단어를 모아 문장을 만들진 않는다. 아직은 재료 상자를 채우는 시간이다.

 

두 번째 공간에서는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지 본다. 다른 작가, 다른 시리즈인데도 “무광–여백–세로형”이 자꾸 눈에 들어오면 그것이 오늘의 중력이다. 세 번째 공간에서 드디어 문장을 시도한다.

 

“나는 무광 표면과 세로형 비례, 여백이 큰 작업을 좋아한다.” 문장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본다. 어딘가 헐겁다. ‘무광’은 너무 넓다. 좀 더 구체화한다. “나는 한지나 무광 종이 위에, 선의 속도가 느리고, 여백이 넉넉한 소형 드로잉을 좋아한다.” 훨씬 단단해졌다.

 

점심을 마치고 ‘대화의 시간’이 오면 선언문을 질문으로 번역한다. 종이 드로잉 앞에서 담당자에게 말한다.

 

“이 시리즈의 표준 크기와 종이·인쇄/인화 공정은 무엇인가요? 프레임 사양은 유브이 아크릴·아카이벌 매트로 권장하시나요? 프레임 포함 총액 견적이 가능할까요?” 영상 앞에 서면 이렇게 바뀐다. “가정용 설치 버전이 정의되어 있나요? 장비 포함/제외와 대체 스펙, 파일·장비 마이그레이션 권리는 어떻게 안내하시나요?”

 

선언문이 대화의 프롬프트가 되는 순간, 상대의 설명도 정확해지고 기록의 품질이 올라간다.

 

해 질 녘에는 선언문을 현실 테스트에 넣는다. 집의 벽과 예산으로 끌고 와 본다. “40×30cm 드로잉 + 유브이 아크릴 프레임 + 운송/보험 = 총액 Y.” 이 Y가 이번 달 바스켓에 들어오는지, 우리 집의 빛 지도(서향/남향)에서 종이가 안전한지, 복도 폭에서 관람 거리가 확보되는지. 선언문은 장식이 아니라 설치의 계획서다. 테스트를 통과한 문장만 다음 주까지 살아남는다.

 

일요일 밤, 책상 위에 종이를 두 장 올린다. 선언문 A와 선언문 B. A는 “나는 여백이 넉넉한 소형 드로잉을 좋아한다.” B는 “나는 두 톤으로 반복이 규칙적인 중형 회화를 좋아한다.” 워치리스트 상단 10점 중 각 선언문과 맞닿는 것을 표시해 본다. A와 맞는 것이 7, B와 맞는 것이 3이라면 내 한 해의 시간·예산은 A로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며칠 후 페어 프리뷰에서 B와 맞는 것이 대거 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A/B 테스트를 한 달 동안 굴려 보기로 한다. 첫 2주는 A로 문장과 지출을 운영하고, 다음 2주는 B를 적용한다. 그 사이에 프레임 견적, 설치 사진, 실제 생활에서의 만족도를 기록한다.

 

마지막 날, 두 문장 중 더 오래 견디는 문장 -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집의 벽에서 숨을 잘 쉬고, 장보기·출근·저녁 식사 같은 일상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러운 - 을 고른다. 그 문장이 올해의 결정 문장이 된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적는다. “나는 이런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의 문장은 오만이 아니라 가드레일이다. “과도한 광택, 과한 사이즈, 반복이 느슨한 작업은 지나친다.” 이렇게 써 두면 페어의 번쩍임 앞에서도 미소 한 번으로 걸음을 돌릴 수 있다.

 

선언문은 취향을 좁히는 기술이고, 좁아진 취향은 깊어진 만족으로 돌아온다. 성급함이 서늘해지고, 지갑의 속도가 느려진다. 그 느림이 우리를 다음 계절까지 데려간다.

 

추천 미션

  • 빈칸 템플릿: “나는 재료/표면/스케일]이 [어떤 상태]이고 [리듬/색/여백]이 [어떤 방식]인 작업을 좋아한다.” 전시장에서 바로 완성 후 저녁에 총액 문장으로 덧붙이세요.
  • 워치리스트 상단 10점을 선언문과 교차 표기해 보세요. 맞닿는 비율이 60%를 넘으면 문장은 충분히 특정합니다. 40% 이하라면 단어를 더 관찰 언어로 바꿔 보세요.
  • 한 달 루틴: 1~2주(A), 3~4주(B)로 A/B 테스트를 굴리고, 프레임 견적·설치 사진·생활 만족을 점수화하세요. 점수가 높은 문장을 연간 결정 문장으로 채택합니다.

다음 회차 예고: “연간 예산, 속도 조절 - 예산은 분기 단위로, 결정은 하룻밤 단위로”. 취향 선언문을 예산 표·달력에 연결해, 봄·가을의 과열을 피하고 여름·겨울에 정리·보존을 앞당기는 속도 설계를 제안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