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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뉴욕 - 도시가 만드는 기준선과 속도

비 내린 아침, 런던 메이페어의 조용한 골목을 걷다가 유리창 너머로 검은 장갑을 낀 설치 팀이 마지막 수평을 맞추는 모습을 본다. 바깥은 축축하지만, 안은 건조하고 단단하다. 벽 텍스트에는 큐레이터의 문장이 다섯 줄 넘게 이어지고, 쇼카드는 종이 질감부터 진지하다. 런던의 전시는 문헌과 제도가 의사결정을 이끈다. 테이트·서펜타인·바비칸 같은 기관의 어휘가 상업 갤러리의 벽에 자연스럽게 박히고, 프리즈 런던/프리즈 마스터스 기간엔 메이페어-세인트제임스-피츠로비아-버먼지에 이르는 클러스터가 하나의 거대한 각주처럼 작동한다. 바로 옆 블록에서는 소더비·크리스티·필립스의 미리 보기 동선이 갤러리 언어와 맞물린다. 런던이 다른 도시와 다른 점은, 전시장에서 카탈로그까지 이어지는 텍스트의 인장이 거래를 미묘하게 이..

아트 바젤 - 세계 표준이 되는 ‘기준선’ 읽기

바젤 기차역에서 트램을 타고 메쎄(Messe) 앞에 내리면, 거대한 ‘메쎄플라츠’의 원형 천창이 하늘을 잘라내며 입구를 비춘다. VIP 프리뷰 첫 시간, 검은 옷의 사람들 사이로 큐레이터 배지가 언뜻언뜻 보이고, 작은 노트에 숫자를 적는 딜러의 손놀림이 빠르다. 다른 아트페어와 달리 아트 바젤은 “많다”보다 “엄정하다”가 먼저 떠오른다. 출품 심사와 초대 갤러리의 폭이 넓지만, 그만큼 큐레이션의 기준선이 높다. 프리즈가 ‘동시대의 파동’을, TEFAF가 ‘역사와 감정가의 눈’을 앞세운다면, 바젤은 동시대·현대·근대가 하나의 지도처럼 연결된다. 그래서 바젤의 통로를 걷는다는 건 소문을 확인하러 가는 게 아니라, 시장의 공용 언어 - 시리즈의 중심, 표준 사양, 기관 신호 - 를 현장에서 번역하러 가는 일에..

취향 확장 - 사진에서 회화로, 작가 A에서 B로 넘어가기

토요일 아침, 서재 책상에 A4 두 장을 펼친다. 왼쪽엔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진 작가 A, 오른쪽엔 언젠가 들이고 싶은 회화 작가 B. 종이 위에 선을 긋는다. “매체-표면-스케일-리듬-색-문헌” 여섯 축. 작가 A의 사진은 무광 피그먼트 프린트, 40×30cm 소형, 느린 반복, 저채도의 두 톤, 최근 기관 그룹전 본문 수록. 오른쪽 칸에 작가 B를 적어 본다. 아크릴 on 캔버스, 100×80cm 중형, 규칙적 붓질, 두 톤, 개인전 도록 본문. 두 표 사이엔 아직 넓은 강이 흐른다. 나는 가운데에 ‘브리지(Bridge) 후보’를 적는다. “종이 위 아크릴(작가 A의 드로잉/페인팅), 사진 기반 회화(페인팅-포토), 두 톤 반복의 에디션 판화.” 순간 마음이 가벼워진다. 한 번에 건너뛰지 않아도 된..

보험, 대여, 기증 입문 - 지키고, 내어주고, 함께 나누는 길

목요일 저녁, 서랍에서 오래된 서류철을 꺼낸다. 구입 인보이스, COA, 프레임 견적서, 그리고 한 통의 메일. “○○미술관입니다. 귀하의 △△작품을 오는 가을 기획전에 대여받고자 합니다.” 가슴이 먼저 뛴다. 하지만 다음 줄이 곧 마음을 가라앉힌다. “시설 보고서 첨부, 보험은 기관 Wall-to-wall 제공, 포장·운송은 당사 지정.”나는 식탁 위에 한 장짜리 표를 만든다. 왼쪽엔 보험/대여/기증, 오른쪽엔 문서/책임/비용. 그리고 맨 위에 두 줄을 쓴다. “총액은 숫자, 위험은 문장.” 작품을 사랑하는 길은 더 갖는 일이 아니라, 잘 지키고 잘 내어주고 때로는 잘 건네는 일까지 포함된다. 오늘은 세 가지 길의 입구를 생활 언어로 열어 본다. 가격표를 넘어서는 마음의 문제 같지만, 결국은 서류와 문..

위작을 피하는 생활 수칙 - 라벨·문헌·컨디션·가격 신호로 만드는 방어막

늦은 밤, 온라인 뷰잉룸에서 마음이 덜컥 움직였다. 좋아하던 작가의 2000년대 중반 드로잉이 “프라이빗 세일”에 나와 있다. 가격은 최근 결과의 절반쯤. 화면을 넘기다 보니 라벨 사진이 어딘가 허전하다. 갤러리 스탬프 대신 모르는 프레임 숍 스티커, COA는 있지만 발행 주체가 애매하다.나는 노트에 네 단어를 적는다. 라벨, 문헌, 컨디션, 가격. 그리고 한 줄 더: “하룻밤 보류.” 위작을 피하는 기술은 천재적 감식안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생활 절차다. 신호를 모아 문장으로 확인하고, 문장을 문서로 남기는 일. 오늘은 그 절차를 생활 속으로 끌고 와 보자.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한 가지 약속만 지키면 된다. 어떤 물건도, 오늘 보는 것으로 오늘 결제하지 않는다. 출처, 물성, 가격·속도 위작 방어의 핵..

세금, 운송·포장 기초 - 예산을 안정적으로, 작품을 안전하게

비 오는 수요일 저녁, 갤러리에서 받은 인보이스를 식탁 위에 펼쳐 둔다. 작품가 한 줄만 덜렁 있는 줄 알았는데, 작은 글씨가 줄줄이 달려 있다. “포장/운송 별도, 보험 선택, 통관 수수료 구매자 부담.” 옆 칸에는 ‘문전(Door-to-door)’과 ‘공항 인도’ 두 가지 옵션이 적혀 있다. 나는 노트에 한 줄을 크게 쓴다. 작품가 X + 포장/프레이밍 + 운송 + 보험 + (세금·통관 수수료) = 총액 Y. 이 두 줄이 켜지는 순간, 막연했던 설렘이 현실의 문장으로 바뀐다. 보내는 도시는 습하고, 오는 도시는 건조하다. 작품은 종이, 프레임은 유리, 박스 사양은 미정. 잘못 고르면 운송비가 작품가의 절반까지 치솟을 수도 있다.반대로 표준을 정확히 고르면, 우리 집 벽까지의 여정은 놀라울 만큼 매끈해..

작가와의 소통 에티켓 - DM/오프닝에서의 매너

금요일 저녁, 오프닝 시작 10분 전.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 조용한 흰 방으로 흘러든다. 벽 시계가 6시를 살짝 넘긴 순간, 작가가 구석에서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나는 먼저 방 한가운데 서서 전면-45도-라벨을 천천히 읽는다.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 앞에서 30초 숨을 고르고, 오늘의 목표를 다시 떠올린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예의 바른 문장으로.” 오프닝은 구매 상담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공개된 축하 자리다. 인파가 늘자 갤러리스트가 다가와 미소로 말을 건넨다. “어떤 작업이 마음에 남으세요?” 나는 벽을 가리키며 짧게 이유를 말한다. “여백이 울림이 있네요. 이 시리즈의 표준 크기와 문헌 신호가 궁금해요.” 대화의 첫 단추가 예의 바르게 잠기는 순간, 방의 공기..

보관, 액자, 조명 - 집에서 작품을 오래, 예쁘게

일요일 아침, 커튼을 반쯤 걷자 거실 벽의 액자가 고르게 빛을 받는다. 전날 밤만 해도 화면이 어둡게 가라앉아 보였는데, 아침빛에선 종이의 섬유가 선명히 살아난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벽면 스위치 아래 작은 디머를 돌려 본다. 밝기가 내려가자 유리 반사가 줄고, 그림은 갑자기 한 톤 깊어진다. 근처 수납장에는 아카이벌 박스가 두 개 있다. 하나엔 미보관 작품이, 다른 하나엔 COA·인보이스·프레임 견적서가 모여 있다. 서랍에는 안 쓰는 LED 전구가 몇 개, 우측 칸엔 UV 아크릴 조각 샘플과 매트 보드 스와치가 끼워져 있다. 우리 집은 큰 미술관이 아니다. 하지만 작은 습관이 모여 오래, 예쁘게 보게 한다.오늘은 그 습관들을 한 줄씩 되짚어 보려 한다. 작품의 적은 시간과 빛, 습기와 부주의다. 반대로..

연간 예산, 속도 조절 - 예산은 분기 단위로, 결정은 하룻밤 단위로

새해 첫 주 일요일, 식탁 위에 빈 달력과 얇은 파일을 펼쳐 둔다. 지난해의 영수증과 COA, 프레임 견적서가 차분히 쌓여 있다. 나는 먼저 숫자를 적지 않는다. 대신 한 문장을 가운데에 쓴다. “예산은 분기 단위로, 결정은 하룻밤 단위로.” 그 아래에 네 칸을 그린다. 1분기·2분기·3분기·4분기. 각 칸의 구석에 작은 메모를 붙인다. “봄—탐색·소형 구매”, “여름—정리·프레임”, “가을—압축·선택”, “겨울—결산·보존”. 작년의 실수를 떠올린다. 봄의 들뜸에 두 점을 연달아 결제했고, 가을의 과열에 프레임 예산이 밀렸다.올핸 리듬을 바꿔 보기로 한다. 분기마다 한 번, 예산을 조정하고, 모든 결정을 하룻밤을 지나 내리는 방식으로. 이 간단한 리듬만 갖추면, 지갑은 속도를 잃고 판단은 문장을 얻는다...

나의 취향을 한 줄로 - “나는 ○○한 작업을 좋아한다.” 선언문 만들기

일요일 오후, 미술관 로비의 긴 벤치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오늘은 많이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로 한다. “나는 ○○한 작업을 좋아한다.” 빈칸을 오래 바라본다. 오전에 본 전시를 거꾸로 되감는다. 한 벽을 채운 대형 회화는 좋았지만 마음이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오히려 복도 끝, 유리 안쪽에 있던 작은 드로잉 앞에서 발이 멈췄다. 종이의 섬유가 사선으로 빛을 먹고, 여백이 선을 부드럽게 감싸던 그 순간. 노트에 첫 단어가 적힌다. “나는 여백이 넉넉하고 선의 호흡이 느린 작업을 좋아한다.” 문장을 더듬더듬 고쳐 본다. “나는 종이의 섬유가 살아 있고 여백이 넉넉한, 작은 드로잉을 좋아한다.” 단정한 문장 하나가 이상할 만큼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이 문장만 있으면 오늘 이후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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