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전시장, 멀리서 보면 한 톤의 색이 벽을 고요하게 채운다. 가까이 다가서자 표면은 전혀 다르다. 연필이 종이를 수천 번 긁어 지나간 미세한 골이 빛을 먹고, 마대의 거친 올 사이로 물감이 뒤에서 밀려 나와 작은 봉우리를 만든다. 또 다른 벽에서는 칼로 올을 벗겨 낸 한지의 섬유가 숨을 쉬듯 부풀고, 붉은 갈색과 짙은 청색이 문처럼 만나 중앙의 여백을 열어 준다. 한국 단색화는 화면을 칠하는 회화라기보다 시간을 쌓는 작업에 가깝다. 1970년대 전후, 한국의 작가들은 서구 형식의 복제나 속도가 아닌, 반복과 절제, 물성과 호흡의 리듬으로 자신들의 길을 찾아냈다. 박서보의 ‘묘법(Ecriture)’은 연필과 한지의 마찰을,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은 캔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