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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vs 에디션 - 판화·사진·조각의 에디션 감각 익히기

o-happy-life 2025. 8.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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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걷다 보면 비슷한 이미지를 여러 장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한 점은 “Unique(유니크)”라 쓰여 있고, 다른 몇 점은 “1/50, 12/50…”처럼 분수 표기가 붙어 있지요. 어느 작품은 연필로 번호와 서명이 있고, 또 다른 작품은 뒷면(verso)에 스탬프와 라벨이 빼곡합니다. 조각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같은 브론즈 조각인데 바닥에 로마 숫자와 주조소(Foundry) 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부는 “A.P.” “H.C.” 같은 기호가 따라옵니다. 처음엔 복잡해 보이지만, 이 표기들은 결국 희소성과 가격을 설명하는 언어입니다. 한 점뿐인 원본(Unique)과, 정해진 수량 안에서 제작·판매되는 에디션(Editioned work)의 차이를 이해하면 판화·사진·조각을 훨씬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언어의 핵심을 정리해, 전시장 라벨과 경매 카탈로그를 스스로 읽을 수 있는 감각을 만들어 봅니다.

 

에디션의 가격 결정 기준

에디션은 “정해진 수량 안에서 동일 이미지/형태를 제작·판매”한다는 약속입니다. 표기는 보통 번호/총수량(예: 12/50)으로 쓰고, 여기에 A.P.(Artist’s Proof, 작가 보관본), P.P.(Printer’s Proof, 인쇄자 보관본), H.C.(Hors Commerce, 비판매 표기였으나 현실에선 거래되는 경우가 있음) 등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원본’의 뜻이 매체마다 다르다.

  • 회화·드로잉: 대체로 하나뿐인 유일본이 ‘원본’입니다. 복제는 포스터·캔버스 프린트 등 재현물 일 뿐, 미술로서의 판화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 판화(Printmaking): 동판화·목판화·석판화·실크스크린 등 작가가 판(plate, block, stone, screen)을 직접 만들고 찍는 과정 자체가 창작입니다. 즉, 좋은 판화의 에디션은 “복제”가 아니라 원작의 다른 형태에 가깝습니다. 에칭의 플레이트 마크, 잉크 입자, 종이결, 작가의 연필 서명/번호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사진(Photography): 같은 네거티브/디지털 파일에서 여러 장을 찍을 수 있기에, 에디션 관리가 작품의 ‘원본성’을 대행합니다. 인화 시기(작가 생전·동시대 인화 vs 사후 인화), 인화 방식(젤라틴 실버, C-프린트, 피그먼트 잉크젯), 종이/사이즈, 스튜디오 스탬프와 COA가 진짜/가짜를 가르는 실질 기준이 됩니다.
  • 조각(Sculpture): 브론즈 등 주조 조각은 보통 한정된 캐스팅 수량으로 에디션을 만듭니다. 바닥에 주조소 마크, 번호, 로마 숫자가 새겨지고, 관행적으로 “본 에디션 + 작가본(AP)”이 묶여 관리됩니다. 지역·작가·시대별 관행 차이는 있으나, 캐스팅 수량은 작품 가치의 큰 축입니다.

둘째, 에디션 수량·제작 품질·시간 정보가 가격을 가른다.

  • 수량(Size of edition): 일반적으로 적을수록(예: /20) 희소성이 커지고 가격이 높아집니다. 다만 수요가 더 중요합니다. 인기 작가의 /100가 무명작가의 /20보다 비쌀 수 있지요.
  • 제작 품질(Process & collaborator): 동판/석판/스크린의 정교함, 종이(코튼/데크 엣지), 잉크, 인쇄공방(Printshop)의 수준이 가격을 밀어 올립니다. 사진은 인화 방식과 아카이벌(내구성) 등급이 핵심입니다.
  • 시간 정보(Vintage/early state): 사진의 빈티지 프린트(촬영/발표 시점 근처 인화), 판화의 초기 상태(State), 조각의 초기 캐스팅은 프리미엄이 붙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셋째, 라벨의 숫자만 보지 말고 ‘총량’을 확인하라.
12/50 한 장만 보면 50장이 전부처럼 느껴지지만, A.P., P.P., H.C.가 별도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조각 역시 본 에디션 외에 작가본(AP), 에디션 외 시험작이 있을 수 있으므로, 총 제작량과 유형을 함께 묻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본 에디션 50에 A.P. 5, P.P. 2가 더 있는가?”, “조각은 본 에디션 8에 A.P. 4 형태인가?” 같은 질문이 가격 감각을 단단히 만듭니다.

요약하면, 에디션은 숫자(총수량) + 품질(과정/종이/인화/주조) + 시간(초기 제작 여부)의 합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셋이 균형을 이룰 때, 가격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에디션 판단하는 법 

전시장·경매·온라인 뷰잉룸에서 에디션을 고를 때는 아래의 생활형 루틴을 활용해 보세요.

① 라벨 읽기-표기 해독의 순서

  1. 번호/총수량(예: 7/30) → 2) 방식(Etching, Lithograph, Screenprint / Gelatin silver, C-print, Pigment print / Bronze, Resin 등) → 3) 이미지 크기와 지지체 크기(image vs sheet) → 4) 서명·연도·스탬프(작가 자필 서명, 인쇄공방·스튜디오 스탬프, 주조소 마크) → 5) COA·에디션 문서(총수량·A.P./P.P./H.C. 포함). 이 순서대로만 확인해도 절반은 해결됩니다.

② 판화 : ‘원작 판화’와 ‘재현 프린트’ 구분
작가가 직접 판을 만들고 찍은 오리지널 프린트인지, 회화 이미지를 디지털로 재현한 아트 프린트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전자는 과정 자체가 창작이므로 서명·번호·플레이트 마크·인쇄공방 정보가 명확합니다. 후자는 장식성은 있으나 미술시장 가치 측면에서는 다른 궤도로 봅니다. 헷갈리면 “작가가 제작한 판에서 찍은 작품인지”, “어느 프린트숍과 협업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세요.

③ 사진 : 인화 시기와 방식, 스튜디오 기록
같은 이미지라도 촬영 시점에 가까운 인화(Vintage), 작가 생전의 동시대 인화, 사후 인화(Posthumous)는 가치가 다릅니다. 젤라틴 실버/크로모제닉(C)·피그먼트 잉크젯 등 방식의 보존성도 중요합니다. 뒷면의 스튜디오 스탬프, 캡션, 번호, COA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작가 또는 스튜디오의 에디션 선언문(총수량·사이즈별 배분)을 받아 두세요. 디지털 파일 기반 작업은 사이즈별 에디션을 나눠 운영하는 경우가 많으니, 40 ×50cm / 100 ×120cm 등 사이즈-별 총수량을 모두 확인해야 합니다.

④ 조각 : 캐스팅 체계와 주조소 품질
브론즈 조각은 로스트 왁스 주조 과정에서 몰드가 관리됩니다. 바닥의 에디션 번호, AP 표기, 주조소 마크가 선명한지 보고, 본 에디션 수량 + AP 수량을 합한 총량을 묻습니다. 주조소의 평판과 마감 품질(용접 이음, 패티네(착색), 표면 결)도 가격의 일부입니다. 레진·파이버글라스 등 대체 재료는 경량·유지관리 장점이 있지만, 스크래치·변색 리스크를 감안해 보관법을 함께 확인하세요.

⑤ 컨디션 : 종이·표면·가장자리
판화는 라이트 스테인(light stain), 폭싱(갈색 반점), 매트 번(매트 테두리 변색), 크리즈(접힘), 테어(찢김) 여부를, 사진은 컬러 시프트, 페이딩, 은반점(silver mirroring) 등을, 조각은 패티네 손상, 흠집, 구조 보수를 봅니다. 컨디션 리포트를 요청해 문서로 보관하세요.

⑥ 예산대별 선택 : 작은 수량 vs 대표 이미지

  • 입문(≤100만 원): 작은 에디션의 판화·사진을 찾되, 작가의 핵심 모티프가 담긴 것을 선호하세요. 숫자(총수량)만 생각하지 말고, 제작 품질과 스토리를 함께 보세요.
  • 중급(≤1,000만 원): 대표 시리즈의 중·소형 에디션을 검토하고, 동일 이미지의 사이즈별 에디션 배분을 비교합니다. 사진은 빈티지/동시대 인화 여부가 가격을 크게 가릅니다.
  • 중급 이상(>1,000만 원): 조각은 초기 캐스팅, 명성 있는 주조소, 판화는 초판 상태(early state), 최고급 인쇄공방 협업, 사진은 작가 생전 인화 + 견고한 프로버넌스를 중시하세요.

⑦ 문서 : 끝까지 명확히
에디션은 문서의 세계입니다. 인보이스, COA, 에디션 선언문, 스튜디오/주조소 레터, 전시·출판 기록을 하나의 폴더로 모으세요. 나중에 같은 이미지가 다른 경로로 등장했을 때, 당신의 작품이 어디에 속하는지 명확히 설명해 줄 ‘말’이 됩니다.

주요 용어 및 추천 미션

주요 용어

  • A.P. (Artist’s Proof): 작가 보관본. 총수량 산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표기하더라도 실제 시장에서는 가치·희소성 면에서 본 에디션과 유사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작가·시대별 관행 차이).
  • P.P. (Printer’s Proof): 인쇄자가 보관하는 교정/기념 프린트. 소량 존재하며 인쇄공방 스탬프가 동반됩니다.
  • H.C. (Hors Commerce): ‘상업용이 아닌’ 표기. 역사적으로 판매용이 아니었지만 현실에서는 거래되는 일이 있으니, 수량·출처를 특히 꼼꼼히 확인해야 합니다.

추천 미션

  • 판화: 전시장 직원에게 플레이트 마크/종이/프린트숍 정보를 묻고, 연필 서명·번호의 필압과 위치를 직접 확인해 보세요.
  • 사진: 뒷면 스탬프·캡션·COA를 반드시 확인하고, 인화 시기(촬영/발표와의 시간 간격)를 기록에 남기세요.
  • 조각: 주조소 마크·번호·AP 표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총 캐스팅 수량보수 이력을 서면으로 받아 두세요.

다음 회차 예고: “기록이 곧 가치 - 프로버넌스·전시이력·카탈로그 레조네”를 다룹니다. 작품의 과거가 왜 현재의 가격과 직결되는지, 그리고 일반 애호가가 어떤 문서부터 확인하면 되는지 실전 루틴으로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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