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첫 주, 빈 달력 페이지를 펼쳐 펜을 올린다. 가장 먼저 쓰는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루틴의 자리들이다. “매주 한 번 미술관, 매월 한 번 프리뷰, 분기마다 페어/여행 대체 루틴, 반기에 한 번 프레이밍.” 달력 옆에는 한 장 짜리 문서가 붙는다. 제목은 단순하다.
Watchlist - 선호·증거·총액. 이 표의 첫 열에는 이름이 아니라 이미지/시리즈가 적힌다. 두 번째 열에는 문헌·기관 신호, 세 번째 열에는 프레임·운송을 포함한 총액의 두 줄 환산표가 들어간다. 오늘의 계획은 ‘더 많이 보기’가 아니라 ‘동일 포맷으로 반복 기록하기’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봄 페어의 소란, 여름 미술관의 정숙, 가을의 압축된 일정—계절은 바뀌어도 폴더 구조와 문장 길이는 바뀌지 않는다. 일 년을 잘 보낸다는 건 결국, 감탄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결정의 문장을 한 문장씩 쌓는 일임을 이 달력은 조용히 알려 준다.
1년 로드맵 : 계절 루틴, 예산 총액...
1년 로드맵의 뼈대는 네 줄로 정리된다. (A) 계절 루틴, (B) 예산 총액, (C) 문서·데이터 스택, (D) 위험·보존의 규칙.
(A) 계절 루틴
- 겨울(1 ~ 3월): 실내·정리의 계절. 온라인 뷰잉룸으로 확대–대조–기록을 연습하고, 미술관에서 표준 사양을 눈에 익힌다. 프레임·보존 계획을 세우고, 지난 해 영수증·COA·인보이스를 스캔해 폴더를 정돈한다.
- 봄(4 ~ 6월): 탐색과 입문의 계절. 신진 작가·사진·판화의 에디션 구조를 실제 부스에서 확인한다. 스튜디오 방문을 1–2회 잡아 작업의 현재형을 듣는다. 작은 구매는 문서·총액이 선명한 것부터.
- 여름(7 ~ 8월): 느린 학습의 계절. 기관 전시와 도서관에서 문헌 신호를 채집하고, 프레이머에서 UV 아크릴/아카이벌 매트를 테스트한다. 반기 정산과 함께 워크어웨이 넘버(총액 상한)를 재설정한다.
- 가을(9 ~ 11월): 압축과 비교의 계절. 페어·프리뷰·경매가 겹치므로 ‘스캔(오전)-대화(오후)-정리(밤)’의 삼단 루틴으로 과열을 막는다. 같은 시리즈의 중형 표준 사양에서 수평 비교하고, 설치·영상은 마이그레이션 조항을 계약 언어로 확인한다.
- 연말(12월): 결산과 보존의 계절. 프레임·운송·보험·세금까지 포함된 총액 스냅샷을 만들고, 내년의 예산 총액의 초안을 잡는다.
(B) 예산 총액(월→분기→연간)
월 100 단위를 기본으로 하되, 분기 예산을 분배한다. 예: (티켓·카탈로그) 15, (소형 원본/에디션) 50, (프레이밍·운송) 25, (예비) 10. 분기 말에는 실제 지출을 기준으로 리밸런싱 한다. 중요한 건 항목이 아니라 총액이다. 모든 대화·기록은 “작품가 X + 프레임 + 운송/보험 + (세금·서류) = 총액 Y”의 두 줄로 닻을 내린다.
(C) 문서·데이터 스택
폴더 최상단에는 캘린더-동선-워치리스트-기록/비용 네 탭 문서를 고정한다. 캘린더는 RSVP·프리뷰 마감에 별색, 동선은 클러스터 90분 루트로, 워치리스트는 이미지/시리즈·표준 사양·문헌·총액 4열로, 기록/비용은 영수증·COA·라벨 사진 링크를 붙인다. 같은 포맷으로 반복하면, 감상은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결정의 근거가 된다.
(D) 위험·보존의 규칙
모든 구매는 하룻밤 보류, 모든 입찰은 총액 상한(워크어웨이 넘버)을 전제로 한다. 종이·사진은 50럭스 전시의 논리를 집에 옮긴다(빛·습도·UV). 설치·영상은 “가정용 설치 버전·대체 장비·마이그레이션”의 세 문장을 계약서에 넣는다. 위험을 미리 문장으로 적어 두면, 즐거움의 지속 시간이 길어진다.
계절별 루틴
겨울 : 책상 위에서 시작하는 컬렉팅
1월의 어느 토요일, 창을 반쯤 열어 두고 책상 위에 노트북·스캐너·프레임 샘플을 올린다. 오전엔 온라인 뷰잉룸에서 관심작 6점을 탭으로 나란히 띄운다. 연도/치수/재료/에디션/문서/총액 6열 표로 비교하고, 의심되는 표면은 원본 해상도·짧은 비디오를 요청한다. 점심 뒤에는 지난해의 인보이스·COA·라벨 사진을 기록/비용 탭에 붙인다. 저녁엔 프레이머의 샘플을 같은 조도에서 비교해 반사율·색온도 차이를 메모한다. 하루가 끝나면, 워치리스트 상단의 두 점만 남는다. “왜 이 작업인가?” “총액은?” 두 문장이 설득되면, 메일 초안만 저장하고 하룻밤을 둔다.
봄 : 발걸음으로 배우는 표준 사양
4월의 맑은 토요일, 도심의 클러스터를 90분 코스로 돈다. 첫 갤러리에선 대표 시리즈의 표준 크기를, 둘째에선 변주를, 셋째에선 다른 매체의 동일 문법을 본다. 모든 대화는 네 문장으로 시작한다. “표준 사양은?”, “기관·도록 신호는?”, “에디션 구조(사이즈별)는?”, “프레임·운송 포함 총액은?” 오후엔 스튜디오를 방문해 작업 노트를 넘겨 본다. 종이·섬유·세라믹의 생활 재료는 손의 언어로 설명될 때 납득이 빠르다. 저녁엔 카페에서 두 줄 환산표로 오늘의 숫자를 정리한다. 봄의 구매는 작아도 좋다. 근거가 명료한 작은 결심이 다음 계절의 체력을 만든다.
여름 : 느리게 정리하고 오래 즐기기
7월, 도시의 속도가 느려질 때 우리는 정리의 속도를 높인다. 미술관에서 저조도 전시를 유심히 보고, 도서관에서 카탈로그의 본문/도판 페이지를 워치리스트에 맞춘다. 한편 집의 벽을 다시 잰다. “120×100 두 점, 간격 40cm” - 미술관의 설치 논리를 우리 집의 바닥 계획으로 옮겨 적는다. 프레임 작업은 이때 몰아서 진행한다. 프레이머와의 대화는 “보존이 목적”임을 명확히 한다. 여름에 길게 가져간 한 해의 노트는, 가을의 압축을 견디게 하는 저수지가 된다.
가을 : 압축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
9월이 시작되면 달력의 색이 바뀐다. 페어·경매·프리뷰·오픈스튜디오가 겹친다. 첫 주는 캘린더-동선을 완성하고, 둘째 주부터는 “오전 스캔-오후 대화-밤 정리”를 고정한다. 스캔은 전면·디테일·라벨 3장만, 대화는 총액 언어로, 밤의 정리는 워치리스트 상단 5점 + 두 문장(왜/총액)으로 끝낸다. 설치·영상은 “가정용 설치 버전·대체 장비·마이그레이션”을 계약 언어로 확인하고, 보증 로트/제3자 보증은 보증선+α 구간에서 체력을 점검한다. 경매는 프록시를 이용해 상한선을 총액 기준으로 고정한다. 가을의 승부는 지식이 아니라 규율이 낸다.
연말 : 결산과 감사, 그리고 덜어내기
12월, 폴더를 열어 한 해의 지출을 항목이 아닌 이미지 단위로 정리한다. ‘좋아한 이유’와 ‘설명 가능한 근거’가 여전히 맞물리는지 확인한다. 합이 맞지 않는 작품은 프레임/설치 재조정으로 만족의 기간을 늘리고, 넘쳐나는 워치리스트는 과감히 덜어낸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년의 한 줄을 적는다. “선호-증거-총액, 같은 문장으로 한 번 더.”
주요 용어 및 추천 미션
주요 용어
- 워크어웨이 넘버(총액 상한): 작품가가 아닌 총액 기준의 철수선. 프록시 비드·페어 협상 모두 이 숫자에서 출발·종료한다.
- 리밸런싱(Rebalancing): 분기 말 실제 지출·만족도를 바탕으로 바스켓 비중을 재조정. “작품가 vs 프레임/보존” 비율을 계절마다 최적화한다.
추천 미션
- 캘린더-동선-워치리스트-기록/비용 네 탭 문서를 한 번 만들고 같은 포맷으로만 채우세요. 비교가 쉬워지고, 결정에 속도가 붙습니다.
- 미술관에서 본 표준 사양을 경매 프리뷰·갤러리 라벨과 교차 표기하세요. ‘근거→가격’ 전환이 자동화됩니다.
- 모든 대화의 첫 줄을 총액 언어로 시작하세요. “작품가 + 프레임 + 운송/보험 + (세금·서류) = 총액” 두 줄이 과열을 막고, 만족을 길게 만듭니다.
마무리 소회
30여 회의 여정에서 우리는 시장의 신호, 기관의 문장, 작가의 호흡, 그리고 생활의 제약을 같은 표 위에 올려 보았습니다. 거창한 비법은 없었습니다. 다만 같은 질문을 같은 순서로 반복했을 뿐입니다. 선호는 무엇인가? 증거는 무엇인가? 총액은 얼마인가? 이 세 문장이 여러분의 컬렉팅에 작은 등불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