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초의 첫 토요일, 메모앱 첫 줄에 숫자 하나를 적는다. “이번 달 미술 예산: 1,000,000원.” 카드 명세서와는 별개의, 기쁨을 관리하는 통장 같은 숫자다. 계획은 단순하다. 전시 몇 개를 제대로 보고, 작가 노트를 한두 권 모으고, 소형 작업 하나를 고르고, 남은 돈으로 프레이밍을 깔끔히 마무리한다.
지난 시즌의 실패 - 티켓을 무심코 쌓다가 소형 작품을 놓친 일, 프레임 비용을 간과해 총액이 틀어진 일 - 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총액 예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항목을 나누지 않고, 한 달 동안 미술에 쓰는 모든 지출을 한 바스켓에 넣어 사후 배분하는 방식이다.
지갑을 열기 전, 벽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번 달의 목표는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문장을 남기는 것이다. 왜 이 전시였는지, 왜 이 작품이었는지, 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나?” 그 문장이 떠오르면, 그날의 지출은 이미 반쯤 성공이다.
100만 원의 분배 기준
예산 100만 원은 많지도 적지도 않다. 핵심은 총액-시간-증거의 삼각형을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시작하면 안정적이다. 티켓·교통·소책자에 15만, 카탈로그·모노그래프에 15만, 소형 원본·에디션에 50만, 프레이밍·운송에 15만, 예비비 5만.
이 다섯 칸은 상황에 따라 미세 조정하되, 소형 구매(50만)과 프레임(15만) 두 기둥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편이 좋다. 작품가만 생각하고 프레임을 빼먹으면, “한 달의 기쁨”이 “다음 달의 부담”으로 이월된다. 종이·사진 작품이라면 UV 아크릴과 아카이벌 매트·백보드만으로도 감상이 급격히 개선된다. 회화라면 플로팅 프레임이 벽에서의 존재감을 올린다.
시간은 돈을 돕는 가장 값싼 자원이다. 하룻밤 보류 규칙-오늘 본 작업은 오늘 결제하지 않는다-을 기본값으로 두면, 충동의 확률이 크게 준다. 대신 “총액 환산표”를 만든다. 작품가 X + 프레임 + 운송 + 세금(있다면) = 총액 Y라는 두 줄을 메모앱 상단에 고정하면, 밤의 열기가 아침의 문장으로 식는다.
증거는 선택의 뼈대다. 문서·사진·라벨이 여기에 포함된다. 갤러리에서 받은 프라이스 리스트·프레스 릴리스, 뒷면 라벨 사진, 작가의 전시·문헌 신호를 한 폴더에 모아두면, 50만 원짜리 소형 작업도 기관·문헌의 좌표 위에서 결정된다.
같은 금액이라도 “대표 시리즈의 소형 변주 + 문서 명확”은 “무제·출처 불분명”보다 만족도가 길게 지속된다. 에디션이라면 사이즈별 총수량과 A.P./P.P. 존재 여부를 반드시 확인한다. 작은 숫자(예: 10/30)가 아니라 이 크기에서의 30이 중요하다.
숫자로 감을 더해 보자. 예컨대 38만 원의 피그먼트 프린트를 선택했다고 하자. 프레이밍을 UV 아크릴과 아카이벌 매트로 11만 원, 운송 2만 원을 더하면 총액 51만 원이다. 총액의 절반을 썼으니 남은 49만 원에서 티켓·카탈로그 20만, 예비비 5만을 제하면 24만 원이 남는다.
이 금액으로는 드로잉 소품, 작가 포스터(오리지널 판화 아님), 혹은 다음 달 프레임 선결제를 고려할 수 있다. 한 달을 이렇게 총액 역산으로 걷다 보면, 100만 원이 단단한 모양을 갖기 시작한다.
100만 원 활용 사례
한 달은 생각보다 길고, 잘 설계하면 넉넉하다. 첫 주의 토요일, 삼청의 기관 전시 두 곳을 연달아 본다. 입장료 1–2만 원대의 티켓 두 장을 끊고, 도록 대신 포켓 가이드를 챙긴다. 벽 텍스트를 한 문단만 읽고 나머지 시간은 작품 앞에서 보낸다. 나오는 길, 도록 구매를 망설이다가 워치리스트에 작가 두 명의 이름만 적는다. “이번 달에 이 둘의 작은 작업을 보고 문서가 명확한지 확인할 것.”
그날 저녁, 노트북으로 뷰잉룸을 열어 같은 작가의 소형 에디션과 드로잉을 비교한다. 확대 보기로 표면의 단서 - 종이 가장자리의 매트 번, 서명 위치, 에디션 표기- 를 체크하고, 채팅창에 다섯 문장을 보낸다. “프레임 포함 여부/운송 범위/세금·통관/에디션 구조/COA 발행 주체.” 답이 빠르게 돌아오면, 스스로의 속도가 늦어도 마음은 안정된다. 그날 밤 결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가→총액 두 줄을 써두고 잠든다.
둘째 주 수요일 저녁, 한남의 갤러리 두 곳을 잇는다. 첫 공간에서 대표 시리즈의 표준 사양을 눈에 익히고, 두 번째 공간에서 소형 변주를 본다. 담당자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 소형이 대표 시리즈와 공유하는 규칙이 무엇인가요?” “기관·도록 신호가 붙은 것은 어느 쪽인가요?” 한쪽에서는 24×18cm 드로잉이 42만 원, 다른 쪽에서는 40×30cm 에디션 프린트가 38만 원. 표면의 긴장감은 드로잉이 앞서고, 문서의 명료는 에디션이 우위다.
집으로 돌아와 두 작품의 총액을 비교한다. 드로잉은 프레임에 13만 원이 들고 운송은 직접 픽업으로 0원, 에디션은 프레임 11만 + 운송 2만. 총액은 드로잉 55만, 에디션 51만. 차이는 4만. 월말의 프레임 예약까지 고려하면 에디션이 한 칸 유리하다. 그럼에도 드로잉의 선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면, 하룻밤 보류 규칙을 다시 꺼내든다.
아침에 다시 보고, 두 문장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으면 그때 결제한다. “이 드로잉은 대표 시리즈의 선과 호흡을 소형에서 가장 밀도 있게 보여 준다. 문서는 갤러리 인보이스와 COA로 충분히 보완 가능하다.” 설득이 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기준선이다.
셋째 주 토요일, 성수의 위성 전시를 한 시간 보고, 오후에는 프레이머를 들른다. 샘플 벽에서 UV 아크릴 vs 유리, 아카이벌 매트 vs 일반 매트를 같은 조도에서 비교해 본다.
의외로 프레임 선택이 작품 인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작은 드로잉이었지만, 넉넉한 여백과 얇은 플로팅 프레임을 둘러주니 거실 한 칸의 호흡이 달라진다. 견적서를 받아 바스켓에 반영한다. 프레임 비용은 작품 경험의 절반이라는 말을 이 순간 이해한다.
저녁에는 경매 프리뷰 PDF를 열어 같은 작가의 다른 연도·사이즈를 비교한다. “이번 달에는 사지 않더라도, 다음 달의 상한선을 계산해 둔다.” 배운 숫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넷째 주는 정리의 주간이다. 지출 내역을 폴더의 영수증 사진과 대조해 스프레드시트에 옮긴다. “티켓·교통·소책자 13만 5천, 카탈로그 12만, 작업 51만, 프레임 11만, 운송 2만, 예비비 10만 - 총 99만 5천.” 5천 원이 남았다는 사실이 웃음을 준다.
한 달 동안 모은 프레스 릴리스와 프라이스 리스트는 PDF로 합쳐 ‘9월 아카이브’라는 이름을 붙이고, 폴더의 첫 줄에는 이번 달의 한 문장을 남긴다. “돈을 썼지만, 문장이 남았다.” 이 문장이 쌓이면, 다음 달의 100만 원은 더 천천히, 더 정확하게 쓸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달 내내 즐거움이 잦아들지 않았다는 것 - 첫 주의 티켓에서, 둘째 주의 대화에서, 셋째 주의 프레이밍에서, 넷째 주의 정리에서 - 작은 기쁨이 번갈아 왔다. 예산은 줄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기쁨을 배분하는 도구임을 다시 배웠다.
추천 미션
- 작품가 + 프레임 + 운송(+세금) 두 줄 환산표를 메모앱 상단에 고정해 두세요. 모든 대화가 총액 언어로 정돈됩니다.
- 같은 작가의 소형 드로잉과 동일 이미지의 소형 에디션을 한 폴더에서 비교해 보세요. 표면의 긴장 vs 문서의 명료라는 축이 선명해집니다.
- 프레이머 방문을 작은 전시처럼 즐겨 보세요. UV 아크릴/아카이벌 매트 조합만으로 만족도가 놀랄 만큼 올라갑니다. 견적서를 사진으로 저장해 다음 달 바스켓에 이어 붙이면 계획이 쉬워집니다.
다음 회차 예고: “나의 취향을 한 줄로 - ‘나는 ○○한 작업을 좋아한다.’ 선언문 만들기”. 전시장에서의 막연한 호감을 관찰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